태화스토리

태화복지재단과 함께하는 태화인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우리 아미동은 주민들이 행복한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2016.05.16
조회수 1,074

 

“더불어 숲”

 

아미동에는 산 19번지라고 불리는 작고 연약한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도시재생사업도, 그 어떤 지원이 없을 때부터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숲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분이 계십니다.
올해로 18년째 통장을 하시는 윤지선 통장님과의 기분 좋은 만남의 시간을 가져볼까요?

 

 

%uAFB8%uBBF8%uAE30_12711172_630595343745500_2357969669554257323_o.jpg

 

1. 아미동 통장님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 몇 년째 활동하고 계신지?
1999년 5월 1일, 처음으로 통장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가 49살이었는데 동네 주민이 추천해서 뭣도 모르고 주민센터에 가보라고 해서 동장실에 들어니까 동장님이 “통장 의향이 있습니까?” 하는데 “아니요. 그냥 내려와 보라고 해서 왔어요.” 라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통장들이 거의 남자들이었고, 연세가 많은 분들이 많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기에 연세 많은 통장들을 줄이고 새롭게 통장을 선출하던 때였던 거죠. 직원들이 괜찮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온 것이 처음 통장을 시작하게 된 거죠. 첫 통장회의에 갔더니 남자가 26명이고, 여자가 저를 포함해서 2명이었는데 그 당시 젊고 어린마음에 그렇게 떨릴 수가 없었어요(웃음).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올해로 벌써 18년째 통장을 하게 되었어요.

 

 

2. 통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주민들을 위해 ‘이것’ 하나는 꼭 지킨다 하는 것이 있다면?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꼭 실천으로 옮기는 거죠. 그래서 제가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게 공중화장실 수리에요. 16통은 집이 너무 작아서 집마다 화장실이 없어요. 그래서 공중재래화장실을 썼는데 그 당시 지게꾼이 다 똥을 펐어요. 아 정말, 그것처럼 고역은 없었죠. 여름엔 냄새도 진동하고 화장실 주변으로 구더기가 막 다녔어요. 통장이 되기 전부터 공중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꿀 순 없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통장이 되고 6년 정도가 됐을 때, 구에서 공중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조하는 사업이 나왔었죠. 그때 바로 우리 통에 있는 공중화장실 3군데를 모두 추천해서 수세식 좌변기 화장실로 교체를 했어요. 공중화장실 수리는 우리 통에서 제일 먼저 시작해서 다른 통까지 점차적으로 확대가 됐죠. 주민들이 조금씩 돈을 걷어서 지금도 깨끗하게 잘 유지되고 있어요.


2015년에는 사랑방 개소가 자랑이죠. 폐허가 된 공간이 있는데 공사를 해서 부수자니 옆집이 같이 무너지고 그냥 놀려두기는 아깝던 차에 어르신들이 좁은 방에 모여 쪼그리고 앉아 고스톱을 치시는데 ‘통장아, 우리 놀 넓은 방이 있으면 좋겠다.’ 하신 말씀이 생각났죠. 마을공동체역량강화사업으로 우리 동네 주민들이 함께 공모신청을 해서 선정이 되었어요. 그때부터 직접 그 폐가를 모두 뜯어 고치고 쓰레기도 치우고 연탄은행에 요청해서 연탄아궁이를 설치하고 연탄도 후원받고. 애쓰는 우리를 보고 복지관에서 전기공사를 해주고, 주민센터에서도 도배, 장판을 해주더라고요. 결국은 사랑방으로 개소를 해서 추운 날에도 어르신들이 오순도순 잘 지내시잖아요.


저는 우리 통 주민들을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자원을 알아보고 그걸 꼭 끌어오도록 하죠.
 

%uAFB8%uBBF8%uAE30_12748109_630595227078845_2127074979640282278_o.jpg

 

3. 통장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추석연휴였는데 우리 집에 보증금 없이 세 들어 살던 한 할머니가 전화가 와서 내려와 보라고 해서 갔어요. 가보니까 너무 안색이 안 좋아서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혼자 사는 할머니였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지, 돈도 없지. 병원비가 없어서 시신을 찾아올 수가 없었어요. 병원비가 480만원이 나왔는데 제가 원무과에 가서 사연을 이야기 하고 이런 저런 서류를 준비해서 겨우 120만원까지 깎았어요. 그 과정에서 영도에 살고 있는 오빠를 수소문해서 찾았고, 오빠가 병원비를 할부로 갚기로 하고 겨우 시신을 찾아왔어요. 할머니가 아침에 돌아가시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모든 일이 해결됐어요. 하루 종일 굶으면서 뛰어다닌 결과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휴~ 시신을 찾아서 영구차에 보내놓고 다음날 바로 화장을 하고 보조금으로 받은 장제비를 할머니의 오빠에게 줬어요. 그때 그 오빠가 내 손을 붙들고 참 감사해 했어요. 이렇게 연고도 없이 혼자 계신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다 보니 가끔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장례를 치루죠.

 

 

4. 이런 일들이 때로는 버겁진 않은지?
그렇죠. 제가 은근히 큰일이 닥치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되더라구요. 근데 내 통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모른척하면 그건 도리가 아니죠. 통장하면서는 파란만장했다고 할까?(웃음) 1972년부터 아미동에서 살아 지금 44년째 살고 있는데 우리 통이 많이 연약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겠다는 의뢰가 들어오면 나는 무조건 OK에요. 다 연계해야죠. 저는 어디서든 이런 게 오면 많이 얻으려고 욕심을 부려요. 왜냐면 우리 통이 워낙 연약하니까...

 

 

5. 이런 통장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주변의 질타를 받을 때도 있을텐데?
이제는 제가 오래 일하면서 나와 주민들 사이에 신뢰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저도 꽤 하다 보니 뻔뻔해지기도 하고. 그래도 그 와중에도 ‘우리 통장 일 정말 잘한다. 어느 통에도 이런 사람이 없다.’ 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도 많이 나요. 지금은 이 동네를 꽉 잡고 있어요(웃음). 저는 일을 할 때 과정을 다 설명해요. 특히 물품 지원할 때 제일 급하고 필요한 사람부터 배분하는 원칙을 설명해요. 이젠 주민들하고 나랑 신뢰가 생겼기 때문에 질타보다는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분들이 더 많아졌어요.

 

%uAFB8%uBBF8%uAE30_12747490_630595177078850_2511678956927954837_o.jpg

 

6. 아미동에서 통장을 하며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이 마을을 홀딱 뒤집어 놓고 싶어요. 주민들과 잘 논의해서 이제 비석마을을 옆 동네 감천마을처럼 만들자고 해요. 대신 관광객만 많고 주민들에게 혜택은 없고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많이 안 오더라도 이 마을이 좀 더 활성화되고 그 수익금이 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그래야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죠. 우리 아미동은 주민들이 행복한 그런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 저도 더 노력할거구요.

 

 

7. 후배에게 한마디.
리더 라는 건, 내가 리더 라고 해서 으스대면 안 돼요. 말로 하는 리더는 안 되죠. 행동으로 먼저 해야 해요. 밑의 사람을 시키기보다 내가 먼저 나서면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리더 라는 건 그런 거예요. 이제 여러분들도 나이가 들고 조금씩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 늘 먼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말이 필요해요. 그렇게 배려하면서 이웃들과 어울리며 살면 되는 거예요. 저도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일이 생겼을 때 돕는 작은 손길들이 함께 어우러져 같이 살아내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