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스토리

태화복지재단과 함께하는 태화인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태화이야기] ⑤태화의 열린공간

2020.07.16
조회수 23

3.1운동으로 민족 현실에 눈을 뜬 조선 여성들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사회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사회단체를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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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여자관에서 개최된 제4회 남감리회 여선교대회(1924)

 

여자기독청년회(YWCA)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여자기독청년회(YWCA). 기독교 여성들이 사회 현장 속에서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여성사회운동기관이었습니다. 장로교에는 여전도회, 감리교에는 여선교회가 있어 교회 여성들이 복음을 전하고 친교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긴 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현실에 들어가기에는 제약이 많았습니다. 더욱이 일제 침략구조를 거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기에 교회 여성단체에는 한계가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단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3.1운동을 겪은 여성 선각자들은 외국의 예를 보아 여자기독청년회를 조선에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겼습니다. 김활란, 홍에스더, 김함라, 김필례, 유각영, 방신영 등 감리교화 장로교 여성들이 나서서 조직에 착수합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며 여자기독교청년회 조직과 활동을 목격했던 이들 선각자의 노력으로 ‘조선여자기독청년회’ 발기대회가 열린 것은 1922년 3월 27일, 다시 그해 6월 13일 서대문 충정로에 있던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에서 마침내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기성회’가 조직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1년간 임원들이 전국을 돌며 지방 조직에 착수, 1923년 8월에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조직되어 전국 연락망을 지닌 여성사회운동체로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창립 초기 여자기독교청년회는 여성계몽, 농촌계몽, 야학, 절제 운동, 생활개선 운동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여 일반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이처럼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문제는 사무실이었습니다. 독자적인 사무실 없이 기독교청년회, 협성여자신학교, 정신여학교 등 남의 사무실을 옮겨 다니며 회의와 모임을 했습니다. 그러다 독립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1924년 3월. 바로 태화여자관에서 그 사무실을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태화는 이때부터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로 사무실을 옮긴 1932년까지 8년간 여자기독교청년회에 무상으로 사무실을 내주었습니다. 태화는 여자기독교청년회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일처럼 여겨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지원했으니, 여성계몽, 농촌사업, 문맹 퇴치 등 초기 여자기독교청년회 사업이 태화의 공간에서 자리 잡아 갔습니다.

근우회(槿友會)

1926년에는 또 다른 여성사회운동체가 태화 영역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근우회(槿友會)입니다. 남성들이 조직한 신간회(新幹會)의 자매기구였던 근우회는 1920년대 조선 여성들의 민족운동단체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기독교 여성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여성들이 연합해서 만든 것이란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후 기독교와 공산주의 세력이 대치하던 상황에 두 세력이 ‘민족문제’로 손잡은 전무후무한 예가 신간회요, 근우회였기 때문입니다.

근우회는 차미리사, 차사백, 최활란, 김활란, 홍에스더, 손메레, 유각경 등 기독교 여성들과 정종명, 주세죽, 정칠성, 김필애 등 사회주의 여성들이 모여, 여성차별 철폐 봉건적 인습 타파,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인신매매와 공창 폐지, 농촌 여성 지위 향상, 부녀자 노동조건 개선 등 지금까지 추구했던 어떤 여성운동보다 개혁적이고 근본적인 여성사회참여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근우회 조직과 활동에 여자기독교청년회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근우회는 창립과 동시에 사무실을 태화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태화에 ‘붉은 색깔’ 나는 사람들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향하여, 민족을 향하여 문을 개방하고 자리를 마련해준 태화의 ‘열린 마음’.

누가 뭐라 해도 태화는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이 되고자 힘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