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스토리

태화복지재단과 함께하는 태화인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태화역사와 사회복지 이야기 ③ '아동보건사업' 이야기

2020.05.13
조회수 106

 

세 번째 이야기 - '아동보건사업' 이야기

"목욕날과 콩우유"

 

"반타작. 반만 살아도 다행이던 시절."
 1920년대 한국의 유아 생존율은 50% 미만. 두 살 안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반도 안 되었습니다. 낳는 것도 어려웠으나 키우기는 더욱더 어려웠던 시절. 두 살 되기까지 호적에 올리지 않고 두고 보기도 하고, 명(命)을 늘린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개똥이", "돼지", "두엄이", "분순이" 같이 천하고 지저분한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1921년에 태화관이 문을 열고, 처음 시작한 일은 어린아이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태화진찰소' 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하며 이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했습니다. 1924년, 간호학을 전공한 로젠버거(E. T. Rosenberger)가 와서 일제강점기 말 강제로 쫓겨나기까지 16년 동안 아동보건사업분야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로젠버거는 부임하자마자 "치료보다 예방" 이란 보건학 근본이념을 사업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시작한 것은 아동건강 점검사업.

 

 "조선에는 아직 순전히 어린 아해들이 건강을 위하야 만드러노흔 기관이 업서 매우 유감이든 바 시내 인사동 태화여자관에서 태화진찰소 사회봉사부가 생기어 1주일에 다섯 번씩 어린 아해의 건강 진달을 하되...
-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중 일부

 

%uD0DC%uD654%uC9C4%uCC30%uC18C%uC758%20%uC5B4%uB9B0%uC774%20%uAC74%uAC15%uC9C4%uB2E8%20%uBAA8%uC2B5%281928%uB144%29.jpg
<태화진찰소의 어린이 건강진단(1928)>


 그때까지 서양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하여 꺼리면서 오지 않았던 조선 부인들도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아기를 들러업고 태화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병 있는 아이는 고쳐주고 건강한 아이는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격려했으니, 태화에서 1925년부터 5월 둘째 주간을 '아동보건주간'으로 정하고 건강한 아이를 심사해 표창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러한 의도였습니다.


"몸무게·키·가슴·머리크기 각 20점,
머리털 10점, 정수리·숨구멍 각 10점,
얼굴·눈·코·입·귀 각 40점, 앉은 자세 20점..."


 아이의 건강 상태를 채점하여 시상하였으니, 1950~60년대 한창 인기 있었던 '우량아선발대회' 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25%uB144%20%uC6B0%uB7C9%uC544%uC120%uBC1C%uB300%uD68C.JPG
<태화여자관에서 거행된 제1회 아동건강회(우량아선발대회, 1925)>


 그다음으로 시작한 것이 목욕탕 사업! 아이들의 위생 상태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사업이었습니다. 신생아의 목욕은 아이의 건강과 직결된 것이어서 태화의 직원들이 가정을 방문하여 산모와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아이 목욕을 시범해 보이며 오해와 편견을 씻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27년에는 태화여자관 안에 목욕탕 시설을 마련하고 매주 이틀씩 어머니가 아기를 데려와 목욕시키게 했는데, 이름하여 '목욕날'. 처음엔 주저하던 조선 부인들도 한두 번 해 보더니, 목욕 좋을 줄 알고 목욕날만 되면 70~80명씩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두 살 미만의 영아들이 반 이상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간 중요한 이유는 영양부족. 영양실조 걸린 어머니 젖이 말라 먹지 못해 죽는 경우, 이유 없이 어머니 젖을 빨지 않아 죽는 경우, 못 먹어 죽는 경우가 허다했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해도 영양실조로 병치레를 치르기 일쑤였습니다.
 태화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8년부터 '우유급식소' 를 차렸습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우유를 먹지 않았습니다. 무료로 나눠준다고 해도 오질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사람에게 짐승 젖을 먹이느냐?"는 것. 우유급식소를 차리고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난감하던 중, 어떤 부인이 열네 달이나 엄마 젖을 빨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아기를 버리듯 두고 갔습니다. 그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 몇 개월 사이에 건강한 아이로 회생시켜 놓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우유에 대한 선입견을 씻고 조심스럽게 우유를 찾기 시작했다네요.
 그래도 일반인들은 여전히 '소젖' 기피증을 버리지 못했고, 이에 고안한 것이 '콩우유'! 숭실전문학교 농과 교수 루츠(D. N. Lutz)의 도움을 받아 삶은 메주콩을 갈아 거기에 물과 설탕을 넣고 다른 영양분을 섞어 만든 영양식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콩우유를 만들어 직접 마셔 해가 없음을 시범해 보였고, 그제서야 "콩이라니까" 하며 말라비틀어진 아기에게 젖병을 물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유급식사업은 세월이 흘러 점차 활기를 찾았고, 일제강점기 말 그 암흑시기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업이 됩니다.

 

 태화의 일은 시작부터 죽어가는 아기를 '살려내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