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스토리

태화복지재단과 함께하는 태화인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태화역사와 사회복지 이야기① '태화관' 3.1운동 이야기 - "별유천지 6호실"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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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역사와 사회복지 이야기 ①

'태화관' 3.1운동 이야기 - "별유천지 6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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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挑花流水에 沓然去하니 別有天地에 非人間이라"
"복숭아 꽃 떨어져 흐르는 물따라 아스라이 흘러가네. 속세 떠난 별천지 예 아닌가."
  -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시 <山中 答俗人> 中 -

 

 

 별유천지(別有天地)란, 속세(俗世)에 반대되는 세상, 무릉도원(武陵桃源), 도원향(桃園鄕)으로 묘사되는 이상세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유토피아(utopia) 또는 파라다이스(paradise)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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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독립선언식이 선포되었던 태화관 ‘별유천지’건물.
그 앞의 인물은 당시 중화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옥고를 치른 후
1926년부터 태화여자관 부속 성경학원 교감으로 봉직한 이효덕 전도사>


 태화가 인사동에서 사업을 시작하던 1921년 4월. 태화관 경내에 ‘별유천지’가 있어 장안의 명물이었습니다.
초대관장 마이어스는 이완용으로부터 이곳 부지와 건물을 구입한 후,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사업 기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공식 개관에 앞서 하루 동안 태화관을 일반인에게 개방했는데, 몰려드는 사람들로 개방 기간을 사흘로 연장해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양 여자가 하는 사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온 사람도 많았지만, 태화관 자체를 구경하러 온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400년 동안 권문세도가의 저택이었다가 서울 제일가는 요릿집이었던 태화관은 이 점 외에도 구경거리가 많았으니, 특히, 중문을 지나면 널찍하니 연못이 눈에 들어오고 연못 둘레에 ‘태화정’ ‘낙원정이 오누이처럼 서 있는 중에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계절 따라 그림을 달리 그려내는 풍경이 과연 절경이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 같은 비경이 있었으니 ‘별유천지’가 여기 아닌가 싶었지요. 태화관이 처음 문을 열었던 때가 4월 초였으니,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이태백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별유천지가 이와 다를까. 실제로 태화관 정원 숲으로 이어지는 언덕 입구에는 ‘別有天地(별유천지)’라 새긴 간판이 서 있어 속세와 낙원을 구분 짓는 듯 했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태화관을 구경하러 몰려든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2년 전, 태화관 ‘별유천지’에서 일어난 사건.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은 바로 기미년 만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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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한국독립선언도(허규 그림, 1990)>

 

 그 당시 명월관 분점으로 쓰였던 이곳이 훗날 ‘민족의 성지’라 불릴 만큼 유명한 곳이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 민족대표 29분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 3.1만세운동의 불길을 지폈기 때문입니다.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거사 하루 전에 연락받았던 요릿집 주인은 태화관에서 제일로 치는 방, ‘별유천지 6호실’을 깨끗이 치우고 손님들을 맞았습니다. 아직 겨울 찬바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별유천지’는 민족의 봄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기미년 만세사건 당시, 태화관의 실소유주는 바로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 한말 어지러운 때 권력을 이용해 이곳을 차지했으나 성난 민중의 분노가 두려워 도심 한복판 이 집을 요릿집 명월관에 세주고 변두리로 이사 가서 살던 중, 자기 소유 집에서 이 일이 벌어졌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팔겠다고 내놓을 만했지요. 바로 이때,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선교를 전개할 공간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한복판 인사동 194번지 일대가 감리교 사회선교의 중심, 태화여자관 일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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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태화여자관 유희장(무산아동운동장)>


 선교사들은 태화관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급적 옛 건물을 부수지 않고 사업에 필요하게 개조해서 사용했는데, 어린이들이 뛰어 놓을 수 있는 운동장을 마련하느라 연못을 메운 것 외에는 옛날 풍치를 그대로 간직한 채 손님을 맞았습니다. 태화관 집 중의 집, 경치 중의 경치, ‘별유천지 6호실’. 바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하여 ‘민족의 성지’로 일컬어지던 그 방도 헐리지 않고 원형 그대로 새로운 손님을 맞았으니, 한 세대 후에 민족의 운명을 짊어질 어린아이들의 배움과 놀이의 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1937년 태화관이 대대적인 건축을 하면서 옛날 있었던 건물들을 모두 헐기 전까지 ‘별유천지 6호실’은 태화유치원 교실이 되어 수백 명이 넘는 아이들의 응석과 웃음을 받아들였지요. 비록 남의 땅, 빼앗길 들녘이었지만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이루어질 해방된 세상,

 

‘별유천지’ 낙원을 그리며.